연중 제 16주일 주보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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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체칠리아

‘눈먼 예쁜 소녀’라는 뜻을 가진 가톨릭 여성 세례명은 체칠리아(Cecilia, 세실리아)입니다.이 세례명의 어원 ‘카이쿠스(Caecus)’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눈먼(Blind)’, ‘보이지 않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명문가인 ‘카이킬리우스(Caecilius)’ 가문에서 여성들에게 이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카이킬리아(Caecilia)’가 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눈먼 소녀’ 혹은 영미권에서 ‘지혜롭고 예쁜 소녀’라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결합하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녀 체칠리아(축일:11월 22일)는 2~3세기 로마에서 순교한 가톨릭의 대표적인 동정 순교 성녀입니다. 결혼식 때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전승에 따라 ‘음악가와 악기 제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공경받고 있습니다.이름의 어원(눈먼) 때문에 음악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눈먼 이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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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요한.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1. 말씀읽기: 루카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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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성당 변기 교체

현재 변기 교체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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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연중 제 12주일 마태10,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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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신 공간의 에어컨을 끄고 가실 수 있도록 안내 부탁드립니다.

요즘 에어컨이 너무 조용하니 on/off 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나가시는 분은 꼭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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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소명(2베드1,3-11)

그리스도인의 소명(2베드1,3-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첫째, 믿음에 덕을 더하십시오. 둘째, 덕에 앎을 더하십시오. 셋째, 앎에 절제를 더하십시오. 넷째, 절제에 인내를 더하십시오. 다섯째, 인내에 신심을 더하십시오. 여섯째,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십시오. 일곱째,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

‘믿음에 덕을 더하는 삶’은 믿음을 실천하며 그것을 자랑하거나 독선으로 빠지지 않고 늘 겸손하게 성모님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슬기로운 종처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성실함으로 타인을 향해 양보하며, 믿음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삶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을 가르치고 있고, 이 세 덕을 을 합쳐 ‘향주삼덕(向主德)’ 또는 ‘대신덕(對神德)’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윤리덕과 달리, 하느님께서 신자들의 영혼에 직접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직접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신앙의 핵심 바탕입니다.

신덕(信德, Virtus fidei)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그분께서 교회를 통해 계시하신 모든 진리가 참됨을 굳게 믿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신덕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모든 덕의 출발점이자 근원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능력으로,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망덕(望德, Virtus spei)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행복으로 갈망하며,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의 은총을 신뢰하며 바라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망덕은 현세의 어떤 역경이나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 주는 영적인 닻입니다. 신덕(믿음)이 있어야 망덕(희망)이 생기며, 이 희망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기대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인내로 버티게 만듭니다. 애덕(愛德, Virtus caritatis)은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초자연적인 덕입니다. 향주삼덕 중 가장 위대하고 완성된 덕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고,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신덕과 망덕은 이 세상(현세)에서만 필요하지만, 애덕은 천국에서도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은 향주삼덕(신·망·애)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덕(믿음)이 있기에 삶의 시련을 묵묵히 통제하고 인내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를 향한 망덕(희망)이 있기에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유지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애덕(사랑)이 내 영혼에 가득 차 흘러넘칠 때, 비로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웃과 형제들까지도 품어 안는 완벽한 형제애와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덕에 앎을 더하는 삶

아무리 좋은 의도와 열정(덕)을 가지고 행동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분별력(앎)이 없으면 오히려 그 열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출신의 훌륭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성경에 정통했으며, 주님의 길을 배워 아주 뜨거운 열정(덕)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한 일을 가르치던 선한 전도자였습니다(덕, 바른 행실의 모습)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세례와 온전한 복음의 깊이(앎)는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앎을 전함)해 주었습니다(앎, 지식을 더해줌, 사도행전 18,26) 아폴로는 자신의 기존 지식을 고집하지 않고 겸손하게 참된 앎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그의 선한 열정은 더욱 정교해졌고, 아카이아 지방으로 건너가 성경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을 논박하며 교회를 세우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 전에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열심(덕)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참된 지식(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선한 의도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렬한 빛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후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앎)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참조: 필리 3,8)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적 여정을 걷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알고 말하는 것과 모르면서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서기 위해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가톨릭 교회는 전례주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례시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분명 앎을 더하는 삶입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주일학교, 사목회의 분과활동도 덕에 앎을 더 할 때 믿음은 더 크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

‘앎에 절제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 옳고 그름을 타인에게 무기로 휘두르지 않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다스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교만해지거나 상대를 가르치려 들기 쉬운데, 여기에 절제를 더하면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백성을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단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하느님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에 당신 사랑과 자비와 구원을 풍성하게 베푸셨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을 과시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지식을 나누는 태도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삶의 태도이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거나 대화할 때, 복음 나누기를 할 때,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거나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을 말할 때, 중간에 말을 끊거나 지적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앎에 절제를 더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자들이 학문과 신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교만해질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에, ‘아무리 높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형제들을 섬기는 겸손함과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지식의 추구보다 삶의 실천과 겸손을 우선하는 절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변론가(소피스트)들의 가짜 앎을 비판하며, 스스로의 앎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절제를 통해 진짜 지혜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겉보기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 감추어 두며, 필요한 이가 도움을 청할 때 겸손하게 그 지혜를 전해 줍니다.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공을 세워도 자랑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만 앎을 드러내는 절제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앎에 절제를 더하면 내 등불로 남을 눈부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발밑을 어둡지 않게 비춰주는 따뜻함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삶이란 내가 통제하고 참아 내기로 결단한 상태(절제)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유지해 내는 삶(인내)을 의미합니다. 절제가 순간의 멈춤이라면 인내는 그 멈춤을 시간 속에서 완성하는 뚝심이라고 합니다. 유혹을 끊어내는 절제와 고통을 버텨내는 인내가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경건함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말을 아끼는 것이 ‘절제’라면,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해도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절제에 인내를 더한 삶’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함과 이단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육체적 쾌락과 명예욕을 극도로 절제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이교도들의 침공과 교회 내부의 분열이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분노를 절제하며, 죽는 순간까지 교회를 지키고 수많은 신학 저서를 남기는 위대한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온몸에 극심한 가려움과 통증을 느끼며 질그릇 조각으로 온 몸을 끍어야만 했던 욥도 아내와 친구들이 위로라는 그릇에 담긴 단죄와 비난을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절제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의 결단‘이라면, 인내는 그 차가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믿음을 키워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로서 절제를 완성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앎을 더해 나가며, 신덕과 망덕과 애덕을 키워 나가며 믿음을 삶으로 고백합니다.

인내에 신심을 더하는 삶

인내에 신심(경건)을 더하는 삶은 내가 겪는 고통과 억울함을 단순히 버텨내는 인내를 넘어 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우리 주님께서는 더 억울하셨고, 더 괴로우셨으니 주님을 따르는 나는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지’하면서 기도하는 영적인 삶입니다. 인간적인 인내는 깊은 상처와 외로움, 교만과 보상심리 등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신심이 더해지면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하며 그 모든 것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고, 내 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분노나 분열을 일으키며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멈추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하는 영혼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어려움을 주님을 위해 봉헌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 ‘주님, 이 고통을 바라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 작은 마음으로 상처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을 위로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련은 나를 파괴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입니다. 갈등이나 아픔속에서도 매일의 미사와 기도,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닮은 자녀가 되도록 은총을 줍니다.

오상을 받으신 성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받아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하고 의심한 교회 내부의 오해로 인해 수년 동안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를 금지당하는 혹독한 제재를 받았습니다. 1918년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가 나타나자,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산 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교황청 내부와 일부 의사들은 가짜 기적이며, 신부의 심리적 이상이나 화학 약품으로 조작된 상처라고 의심했습니다. 군중들의 광적인 열광과 거짓 예언자에게 현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청은 1931년 6월 9일 교황청은 비오 신부님에게 가장 강력한 행정 처분을 내립니다. 공동체 미사(공개 미사) 집전 금지, 오직 외부인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수도원 내부의 작은 경당(골방)에서, 복사(미사 보조자) 단 한 명만 두고 철저히 비공개로 혼자서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하루에 최대 15~19시간씩 신자들의 고해를 듣던 ‘고해소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재로 인해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에게도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 성무 집전권이 완전히 정지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영적 지도를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일체의 행위가 전면 차단되었고,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동료 수도자들과의 접촉도 극도로 제한되어, 약 2년 동안 빛이 들지 않는 격리된 방에서 감옥과 같은 생활을 보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는 영적 사형 선고였습니다. 더구나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시기와 오해로 인한 억울한 처분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오직 이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

신부님은 교회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입이 닫혔으니 이제 하느님과 더 깊이 대화하겠다며 묵묵히 기도와 희생으로 그 기나긴 2년의 어둠을 버텨내셨습니다. 이후 신부님의 철저한 겸손과 순명 태도를 전해 들은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 ‘내가 비오 신부님에 대해 잘못 보고 받았다’며 제재를 모두 풀고 성무 집전권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고독한 시간을 오직 묵주기도와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신심)로 채웠습니다. 신부님의 인내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성덕의 열매로 증명되었습니다.

성 십자가의 요한 사제도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이끌던 중, 개혁을 반대하던 동료 수도자들에 의해 좁고 어두운 독방 감옥에 갇혀 아홉 달 동안 모진 매질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을 가둔 형제들을 원망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감옥의 고통(인내) 속에서 하느님과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깊은 신비 영성(신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가톨릭 영성사의 위대한 보물인 영적 시(詩)들을 집필하며 감옥을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인내에 신심을 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거룩한 미사와 성사로 몸과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심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

신심(경건)에 형제애를 더하는 삶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교사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채 길가에 버려집니다(루카 10,30). 이때 그 곁을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교적 신심만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심 깊은 이들이었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시체나 피를 만지면 종교적으로 부정해져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교리적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자부했지만,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함으로써 그들 신심이 껍데기뿐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종교적 행위가 이웃의 아픔과 단절될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이 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개’나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죄인 취급을 당했지만 강도 맞은 이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측은지심)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합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뒤,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고, 이튿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소’(루카 10,35) 하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로 1,5-7)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은 인간적인 덕성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향주덕(向主德, 하느님을 향한 덕)’인 사랑(Caritas, 카리타스)으로 신화(神化)되는 성화의 정점입니다. 형제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교우들, 혹은 내 가족과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며 일치하는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입니다. 사랑(카리타스, Caritas)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형제애의 울타리를 넘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목숨까지 내어주는 ‘자비와 용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친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권력을 잡은 뒤 형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다윗은 자신을 시기하여 군대를 풀고 죽이려 쫓아다니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분이시니, 내 손을 그분에게 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지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조차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존재’로 바라보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는 교회 안의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는 ‘형제애’에 충실했던 부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군중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와 똑 닮아 있었습니다. 스테파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전구의 기도’를 바친 이 모습은 초자연적 사랑으로 완성된 최고의 형제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해졌을 때 형제애라는 아가페적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은 내 본성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그를 사랑하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하느님 자녀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정적이며,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삶에 열정을 다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에 감사하며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1베드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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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 제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형제자매들과 일치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면서

저의 행동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면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삶으로 형제자매들과 평화롭게 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어머니 마리아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저를 내어 놓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면서

나눔과 섬김을 기쁘게 행하며

저의 가정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가정도 생각하게 하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하면서

형제자매들이 저에게 해준 것들만 생각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저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게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유혹의 기회를 멀리하며 형제자매의 의로운 모습을 본받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악행을 되풀이 하지 않으며, 언제나 선행에 힘쓰게 하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할 때는

제가 이 모든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기도해야 함을 명심하게 하소서.

저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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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신학생 봉사활동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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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예수님

가해 연중 제 11주일

1. 말씀읽기: 마태 9,36-10,8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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